월간 농구 1991년 3월호
상식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그것을 기적이라 말한다. 그리고 스포츠를 각본 없는 드라마라 말할 수 있는 이유는 이 ‘기적’을 눈앞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기회를 제공하기 때문일 것이다. 지난해 고교 농구라는 청춘 드라마에서 주인공은 누가 뭐라 해도 북산고등학교(이하 북산)였다. 봄부터 겨울까지 총 4개의 시즌으로 제작된 이 이야기를 간략하게 요약하자면 다음과 같다.
북산은 그 어느 때보다 치열했던 지역 예선을 거쳐, 개교 이래 처음으로 인터하이 본선에 출전한다. 풍전고등학교(이하 풍전)를 누르고 맞붙은 상대는 절대 강자 산왕공업고등학교(이하 산왕). 빼곡하게 채워진 객석은 산왕을 응원하기 위해 온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승패가 자명한 경기, 점프볼을 던지는 순간부터 승자와 패자가 눈에 보이는 시합이었기에, 관객들은 북산이 몇 점 차로 패배하느냐를 주목했다.
여기에 불만을 품고 테이블 위로 올라가는 기행을 보인 당시 북산 1학년 강백호는 “산양은(오타가 아니다) 우리가 물리친다”는 전무후무한 선언을 함으로써 그야말로 ‘악당 출현’이라는 희대의 명장면을 만들어 냈다. 만약 말에서 끝났다면 그대로 주인공의 손에 퇴치당해 저편으로 밀려나는 악당이 되었을 테지만, 북산은 결국 20점 차이까지 벌어졌던 점수를 줄이며 기어이 1점차의 승리라는 기적을 이룬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여기에서 종영되었을 것이다. 더할 나위 없는 완벽한 엔딩이며 ‘그동안 시청해 주셔서 감사하다’는 인사와 함께 새로운 시리즈의 예고가 흘러나오기에 적절한 타이밍이다. 하지만 드라마와 현실은 다르다. 각본 없는 드라마인 스포츠는 현실 세계에 속해 있고, 현실에 엔딩은 존재하지 않는다. 북산은 산왕으로부터 극적인 승리를 얻어 낸 다음의 8강전에서 무참히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나 그로부터 몇 개월이 지나지 않은 윈터컵, 북산은 또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산왕을 꺾었던 역전의 용사들이 다시 뭉친 것이다. 그렇다, 여름 이후 북산은 고교 농구의 팬들로부터 기대와 응원을 받는 용사가 되었다. 윈터컵에서 펼쳐진 북산 농구부의 활약은 ‘악당 출현’이 아닌 ‘영웅의 귀환’이라 칭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매 경기가 명장면으로 가득했다.
북산의 파죽지세는 지난 여름의 승리가 절대로 우연이나 기적이 아니라는 것을 관객과 고교 농구 관계자들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증명하는 듯한 모습이었다. 주장의 4번은 2학년 송태섭에게 넘겼을지언정 골밑은 절대로 내어주지 않는 3학년 채치수(센터)의 묵묵한 활약을 필두로, 새로운 주장이자 코트 위의 사령탑으로서 적재적소에 패스를 던질 뿐 아니라 필요하다면 일대일 돌파도 서슴치 않으며 더욱 날카로워진 기량을 자랑하는 2학년 송태섭(포인트 가드), 청소년 국가대표로 선발되어 국제 경기에서 쌓은 경험에 절치부심한 테크닉으로 명실상부한 고교 농구의 넘버 원 에이스로 거론되는 서태웅(스몰 포워드)과 한번 보면 잊을 수 없는 경이로울 정도로 압도적인 신체 능력과 폭발적인 힘, 그리고 절대로 포기하지 않는 정신력으로 무장한 강백호(파워 포워드)는 본인들이 가진 잠재력과 능력을 관중들 앞에서 매 시합 똑똑히 증명해 냈다.
그리고 때때로 어떤 증명은 각인이 되어 기억에 아로새겨진다. 지난 겨울 윈터컵을 본 사람이라면 절대로 잊을 수 없는 ‘정대만’이라는 이름처럼 말이다.
어떤 스포츠든 끝날 때까지 끝난 게 아니란 격언이 적용되는 순간이 있다. 스포츠가 각본 없는 드라마가 될 수 있는 극적인 클라이맥스를 만드는 순간, 그것을 목격한 우리는 머리카락이 쭈뼛 설 만큼의 전율과 함께 온몸의 혈관을 타고 흐르는 짜릿한 기쁨을 느낀다. 농구에서 그 순간은 단연 ‘버저 비터’다. 농구 팬이라면 누구나 절대 잊을 수 없는 최고의 버저 비터가 저마다 있을 것이다. 그리고 누군가 나에게 당신이 본 최고의 버저비터는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나는 지난 겨울 고교 농구 윈터컵 남자부 결승전에서의 3점 슛이라고 말하겠다.
윈터컵 결승전에서 북산은 큰 점수차를 내주진 않을지언정 한 번도 스코어를 리드한 적이 없었다. 아슬아슬하게 잡힐 듯 잡히지 않는 리드에 후반에서는 다소 초조해하는 모습이 보였지만, 그럼에도 모든 주전 선수들이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잃지 않으며 지난 여름에 비해 훨씬 성장한 모습을 보여 주었다. 후반전 2점 차의 공격 기회에서 블로킹에 가로막혀 동점을 만드는 데 실패한 북산은 마지막 공격을 위한 수비에 집중한 끝에 추가로 점수를 내주지 않고 다시 공격권을 가져왔다.
남은 시간은 12초. 무조건 이 공격은 성공시켜야만 하는 순간이었다. 골밑 안쪽으로 파고들어갔던 포인트 가드 송태섭의 손에서 패스가 나갔고, 그 공은 강백호의 손을 거쳐 외곽으로 빠져 있던 정대만에게 들어왔다. 문제는 이미 빠르게 마크가 따라붙은 상황이라 바로 슛을 쏘지 못했다는 것. 정대만은 직접 드리블하며 잠시 상황을 판단하는 듯 움직였다. 그럼에도 계속 시간은 흘렀고, 정대만은 3점 라인에서는 꽤 멀리 뒤로 빠져 있었다. 일대일의 대치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다들 정대만이 누구에게 패스할지를 살폈지만 초시계의 숫자가 점점 내려가더라도 공은 여전히 그의 손에 있었다. 그리고 버저가 울리기 직전, 정대만은 뛰어올랐다. 3점 라인과 하프라인의 중간 지점에 서 있던 그가 직접 슛을 던질 거라고는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다.
마지막 슛이 던져진 순간, 버저가 울리며 모든 관중과 선수들의 시선은 높게 떠올라 호를 그리는 공을 따라갔다. 중력으로부터 자유로워진 그 공은 누구의 손에도 닿지 않을 공중을 가르며 홀로 고고했다. 공이 체공한 시간은 고작 1초 남짓, 그러나 경기장에 있는 모두가 숨을 멈추며 모든 감각을 집중해 그 움직임을 좇았다. 그 무엇도 자신이 날아갈 궤적을 방해할 수 없다는 양, 정대만이 던진 공은 정확하게 림을 통과했다.
40분 내내 이루지 못했던 역전이 우승으로 직결되었다. 공이 바닥으로 떨어지는 순간, 정대만의 모습은 북산 농구부의 붉은 파도에 휩쓸려 사라져 버렸다. 귀를 멀게 할 만큼 커다란 함성이 체육관을 채웠고, 북산 농구부는 끝내 여름에 쟁취해 내지 못했던 전국 제패라는 목표를 손에 넣었다.
경기가 끝난 후 마지막 버저비터를 넣어 우승의 주역이 된 정대만은 승리의 기쁨으로 벅차오른 동료들에게서 잠시 빠져나왔다. 그 시선이 향한 곳은 농구 골대였다. 정확히는 방금 윈터컵의 우승을 이루어 낸 고등학생답지 않게, 몹시도 복잡한 표정으로 림을 바라보고 있었다. 당사자가 아닌 이상 정확히 명명할 수 없는 그 표정은 슬픔과 후회로도 기쁨과 환희로도 읽혔는데, 함께 존재할 수 없을 것만 같은 감정이 한데 뒤섞여 있음에도 어떤 모순도 느껴지지 않아 인상적이었다. 그 순간 나는 정대만이라는 선수가 몹시 궁금해져서, 도대체 그에게 어떤 사연이 있는 것인지를 알고 싶어졌다. 자신의 모든 것을 불사르는 것 같은 플레이를 하고도 아직 더 태우지 못했음을 아쉬워하는 듯한 이 선수의 연료가 무엇인지를 묻고 싶었다. 불꽃에 뛰어드는 불벌레처럼 속절없이 이끌려 버렸음을 이 자리에서 고백한다.
그러니까 이 글은 기자의 개인적인 사심에 대한 변명을 하기 위해 쓰였다. 왜 하필 이제 막 대학교 1학년이 된 정대만이라는 선수의 인터뷰를 읽어야 하는지 의구심을 품는 독자들을 설득하고 싶었다. 뒤로 이어질 스포일러를 최대한 피해 예고하자면, 나는 이 기사가 부끄럽지 않다. 이 인터뷰 지면을 만든 것을 후회하지 않는다. 아마 이 인터뷰를 읽는 독자인 당신 또한, 절대 후회하지 않을 것이라 감히 단언하겠다.
우선 독자분들께 인사와 자기 소개를 부탁한다.
J: 안녕하세요, Z대학교 체육교육과 1학년 정대만입니다. 올해 Z대학교 농구부에 들어갔고, 포지션은 가드 포워드입니다.
너무 긴장한 것 같다. 빽빽한 훈련과 대학 리그를 소화하느라 바쁘고 힘들 텐데 시간을 쪼개 인터뷰에 나와 주어 고맙다.
J: 긴장한 건 맞습니다. 어린 시절부터 읽던 잡지에 인터뷰를 하러 나가게 된다고 해서 거의 한숨도 못 잤어요. (웃음) 과분한 자리이긴 하지만 놓치면 두고두고 후회스러울 것 같아 나오게 되었습니다. 끝나면 또 저녁 훈련하러 가야죠. 선배님들께서 돌아오면 각오하라고 한 터라 후환이 좀 두렵습니다.
말하다 보면 차차 긴장이 풀릴 거라 생각하고, 쉬운 질문부터 가 보도록 하겠다. 대학 생활은 즐거운가?
J: 음… 이제 2주 정도 지났는데, 사실 하루하루가 어떻게 흘러가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수업을 받는 시간보다 훈련을 하는 시간이 확실히 더 길어졌고, 한 건물에서만 수업을 듣는 게 아니라 여기저기 옮겨다녀야 하는 것도 신기합니다. 아, 그리고 수업 시간이 더 길어져서 깜짝 놀랐습니다. 좀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아침 훈련에 지쳐서 모르고 졸아 버렸는데 한참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도 수업이 끝나지 않아서 조금 당황스러웠어요.
확실히 아직 적응이 덜 된 것 같다. 보통 대학교 신입생이 되면 더 의식해서 수업이 아니라 강의라고 많이 하는데….
J: 사실 아직 교수님이라는 호칭을 써 본 적이 없습니다. 학점과 수업, 아니 강의에도 신경 써야 한다는 걸 아는데 아직은 다 어려워서 적응하는 중입니다.
대학 농구부는 겨울 방학 전지 훈련부터가 시작인데, 전지 훈련은 어떻게 보냈는지 궁금하다.
J: 새로운 팀 동료들, 동기와 선배님들의 얼굴을 익히고 팀이 되어 가기 위한 첫걸음이었는데, 낯을 좀 가리는 편이라 가기 전부터 걱정이 많았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니까 1학년 동기들 중에 아는 얼굴들이 좀 보여서 덕분에 숨을 돌렸고요. 이제 앞으로 4년 동안 이 사람들과 함께 코트에서 뛰는구나 하는 생각에 설레기도 했습니다. 신입생 대 재학생으로 연습 시합을 했었는데 내가 지금까지 해 온 것은 고등학교 농구였구나 하고 실감하게 되었고요.
그럼에도 전지 훈련의 연습 시합에서 20득점을 올렸고 이 중 3점 슛이 6개다. 이미 득점력 차원에서 팀에 큰 기대를 받고 있을 것 같다.
J: 연습 시합이라 선배님들의 수비 마크가 실제 경기만큼 철저하지는 않았습니다. 아마 신입생이라 기를 좀 살려 주시려 한 게 아닐까요. 같이 팀으로 뛰어 준 동기들도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벌써부터 ‘나라 사랑 동기 사랑’의 정신이 느껴진다. 그럼에도 정대만 선수의 3점 슛은 이미 대학가에서도 화제가 되고 있는데, 아무래도 작년 여름 인터 하이와 겨울 윈터컵의 인상이 강렬하게 남아 있기 때문인 듯하다. 특히 여름 인터 하이의 산왕과의 시합에서는 3점 슛 성공률이 무려 89%에 육박한다. 3점 슛의 성공 비결이 있다면?
J: 비결이 있다면…(웃음) 저도 알고 싶습니다. 이제 막 대학 리그에 들어온 신입생이라 ‘성공 비결’을 이야기하는 것도 주제 넘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제 입으로 이야기하기는 부끄럽지만, 많은 분들께서 슛 폼이 좋다는 이야기를 들려주셔서, 그 폼을 잃지 않으려 노력하는 편입니다. 처음 슛을 배울 때부터, 슛을 넣는 감각을 익히기보다 자세를 유지하는 감각에 더 신경을 썼습니다. 처음에는 자세만 신경 쓰느라 슛이 들어가지 않았는데, 자세에 신경을 쓰지 않아도 될 정도로 연습을 한 다음 볼을 던질 때의 감각에 집중했어요.
자연스럽게 처음 농구를 배웠을 때의 이야기를 꺼내 주었는데, 뻔한 질문이지만 피해 갈 수 없는 질문이기도 하니 먼저 치운다는 느낌으로 던져 보겠다. 농구를 시작한 특별한 계기가 있는가?
J: 재밌어서… 시작했습니다. 주변에서 어른들이 잘한다 잘한다 하니까 더 우쭐해져 신이 났던 것 같기도 하고요. 무언가를 좋아하는 이유를 찾기란 어려운 것 같습니다. 이유보다는 정도가 중요하다고 생각해요. 그러니까 얼마만큼 좋아하느냐에 따라 그 일을 계속하느냐 그만두느냐가 정해지는 거 아닐까요? 농구를 시작한 계기는 잘 기억이 안 나지만, 계속하고 있는 계기는 좋아하기 때문입니다. 좋아하니까 포기하고 싶지 않아서 계속해 온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정대만 선수는 농구를 좋아하는지?
J: 정말로 좋아합니다.
그건 농구를 잘하기 때문에 좋아하는 것은 아닌지 묻고 싶다. 중학교 때 중학 MVP를 수상한 이력이 있지 않은가.
J: 그랬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뇨, 솔직히 말씀드리자면 그랬던 때도 분명 있는 것 같아요. 그 시절엔, 음, 많이 어렸습니다. 생각이나 마음가짐 같은 게요. 저만 잘하면 팀이 승리할 거라고 믿었어요. 제가 못하면 팀은 지는 거고요. 저의 퍼포먼스를 위주로 시합을 판단했던 것 같아요. 그런 저에게 새로운 마음가짐을 알려 주신 분이 북산의 안한수 감독님이십니다. ‘마지막까지 희망을 버려선 안 돼,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나는 거야’라고 말씀해 주셨거든요.
혹시 북산으로 진학한 이유가 바로 그 안 감독님이 계시기 때문인가?
J: 네, 안 감독님 곁에서 농구를 하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중학 MVP를 수상할 수 있었던 것도 안 감독님 덕분이었고, 안 선생님께 은혜를 갚고 싶었죠. 음… 은혜를 갚는다는 생각부터가 어렸다는 증거 같습니다.
사실 능남고등학교(이하 능남)의 유명호 감독이 정대만 선수를 데려오지 못한 것에 안타까워했다는 건 고교 농구 지도자들 사이에서 유명한 이야기다. 오직 안 선생님만 바라보고 북산으로 진학한 것을 후회한 적은 없는가?
J: 없습니다.
먼저 후회한 적 없냐고 질문했는데 함정 수사를 한 것 같아 미안하지만, 인터뷰를 위해 정대만 선수의 기록을 찾아보니 고등학교 2년간 공식 경기의 출전 기록이 없다. 정말 후회하지 않는가?
J: 음… 이 점에 대해서는 대단히 긴 이야기가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일단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얼마 되지 않은 시점에 부상을 입었습니다. 공식 시합도 아니고 연습 중에요. 무릎에 문제가 생겼었는데, 농구를 시작하고 처음으로 그런 부상을 입은 거였죠. 지금 생각하면 시합 중 크게 다친 게 아니었고, 충분히 회복할 수 있는 나이대에 겪은 일이라 차라리 다행이라 생각할 수 있는데 그때는 부상이라는 사실 자체가 힘겨웠던 것 같아요.
부상으로 2년 동안이나 쉰 거라면 꽤 큰일이었던 듯하다.
J: (잠시 침묵) 부상 때문에 2년 동안 출전하지 못한 건 아니고, 사실 그 이후 무릎은 나았지만 마음을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시기가 있었습니다. 바보 같았어요. 제가 없어도 된다고 생각해서 농구부로 돌아가지 않고 좀 험한 친구들이랑 어울려 지내면서 시비를 걸고 다녔거든요. 주변에 폐만 끼치고 다녔던 시절이라, 그때를 생각하면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그렇다면 안 감독님께서 다시 정대만 선수를 돌아오게 했는지?
J: 안 감독님께서는 계속 제가 스스로 깨우치고 제 발로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계셨던 것 같습니다. 따로 저를 찾아오셔서 문책하거나 타이르시는 일은 없었어요. 그러다 제가 3학년 초에 사고를 크게 쳐서…. 농구부 친구들에게 정말로 큰 피해를 끼쳤는데요, 그때 다시 안 감독님을 뵈었습니다. 가장 부끄럽고 못난 모습으로 뵌 건데, 저절로 무릎이 꿇어지더라고요. 그때 솔직하게 다시 제 마음과 마주할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농구가 하고 싶다는 말이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때 깨달았어요. 나는 농구를 정말 좋아하는구나 하고. 스스로 계속 외면해 왔던 마음이 터져 나왔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어떻게 보면 안 감독님께서 저를 돌아오게끔 하셨다고 말할 수도 있는데, 사실 안 감독님만이 아닌 같은 농구부원들이나 함께 어울렸던 친구들 모두 제 등을 밀어 주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무엇을 외면하고 있는지, 제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를 가르쳐 준 셈이죠.
방황의 이유는 무엇이었는가?
J: 한마디로 정의할 순 없지만, 농구를 놓았던 그 시절의 저는 농구를 사랑하는 마음이 보답받지 못함에 슬퍼했던 것 같습니다. 음… 그리고 사실 제가 농구를 좋아하는 것보다 제가 얼마나 필요시되는가를 신경 썼던 거죠. 다른 사람의 인정이나 제가 팀에서 얼마나 필요한 선수인가를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중학교 농구부에서는 팀플레이보다 제가 얼마나 잘하는지에만 집중해서 뛰었고, MVP를 받아 우쭐해져서 그런 외부적인 것들에 더 매달렸었던 것 같습니다. 부끄럽지만 농구를 하면서 처음 좌절해 보았거든요. 부상 이전까지 농구는 완전히 저를 위한 세계라고 생각하면서 뛰었어요. 그런데 처음으로 그 세계로부터 밀려 난 거죠. 그리고 저는 제가 없으면 무너질 줄 알았던 그 세계가 너무나 멀쩡하게, 저라는 선수는 애초부터 없었던 것처럼 돌아가니까 혼자 배신당했다고 생각한 것 같아요.
그렇다면 그 생각에서 어떻게 벗어날 수 있었는지 궁금하다.
J: 2년 동안 방황한 게 어이없을 만큼 간단했습니다. 짝사랑이더라도 좋아하는 건 좋아하는 거니까요. 그 마음을 그냥 인정했어요. 그걸 왜 2년간은 하지 못했는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아까 말씀드렸듯이 친구들과 농구부 동료들…. 음 좀 낯간지럽네요 (웃음) 아무튼 주변의 도움이 없었다면 인정하지 못했을 마음이기도 하죠. 그때 후배 하나가 저한테 해 줬던 말이, 누구보다 과거에 얽매이는 사람은 저 아니냐면서 지적을 하더라고요. 사실 그 말이 백 번 맞는 말이었어요. 그리고 또 다른 친구는 저에게 철 좀 들라고 하더라고요. 정말 화를 낼 줄 모르는 친구인데, 얼마나 답답했으면 그랬을까 싶어요, 지금은. 다시 질문으로 돌아가자면, 농구로부터 사랑받지 못해도, 저 혼자만의 사랑이라도 좋다고, 그 마음이 정대만이라는 인간을 이루는 근간이라고 받아들이게 되었어요. 누군가의 인정이라든가, 팀에게 도움이 된다든가 하는 것은 나중의 일이고, 일단 제가 농구를 하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 없는 인간임을 자각한 거죠. 거짓말은 그만하자고 마음먹으니 너무도 쉽게 그 어둠을 통과해 나올 수 있었습니다.
2년 동안의 방황이라면 고등학교 3학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고등학교 농구를 경험한 셈인가?
J: 네, 맞습니다. 고등학교 때 농구를 한 시간은 결국 만으로 1년을 못 채웠어요.
그럼에도 합류하자마자 북산은 개교 이래 인터하이에 진출하는 놀라운 성적을 이루어 냈다.
J: 아니 그렇게 말하니까 제가 막 이루어낸 것 같은데, 절대 그렇지 않고요. (웃음) 이걸 제대로 정정하지 않으면 큰일날 것 같아요. 쫓아올 후배들과 한심하게 쳐다볼 동기들의 얼굴이 선합니다. 겸손이 아니라 정말로 제가 합류하는 타이밍이 좋았습니다. 제가 들어오기 전부터 우리 농구부는 연습 경기에서 능남과 호각으로 싸웠거든요. 같은 학년인 치수는 함께 입부했을 때 스크린도 제대로 걸지 못하던 녀석이었는데, 어느새 지역 내에서 손꼽히는 센터로 든든하게 골밑을 지키는 수문장이 되어 있더라고요. 포인트가드인 한 학년 아래 송태섭은 저와 여러 일들이 있었던 녀석인데, 1학년 때는 제대로 된 출전 기회를 얻지 못했다가 비로소 자기 패스를 받아줄 팀원들을 만나 제 실력을 발휘해 본격적으로 코트를 휘젓고 다닌 거고요. 그리고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그해 신입생으로 굉장한 녀석들이 들어왔습니다. 서태웅은 후배로서 귀염성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위기에서 팀을 몇 번이나 구해 냈고 유소년 대표로도 뽑혔으니 그 재능이야 익히 아실 테죠. 마지막으로 백호, 그 녀석은 자기 입으로 ‘농구 천재’라고 호들갑을 떨긴 하지만, 그 운동 능력은 물론이고 승리를 포기하지 않는 집념이 저희를 더 높은 곳으로 올라가게끔 하는 동력이 되어 주었습니다. 결론적으로는 이미 북산은 훌륭한 팀이었어서, 합류하려면 그 넷에게 없는 무언가를 해내야 했던 거죠.
그 넷에게 없는 무언가가 바로 3점 슛인가?
J: 네. 중학교 시절에는 팀에서 다양한 역할을 맡았고, 그래서 처음 북산에 입학한 뒤 농구부의 자기 소개에서 포지션은 아무거나 다 한다고 말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 농구부로 다시 돌아왔을 땐 이미 그 넷의 포지션이 어느 정도 정해진 상태였죠. 채치수와 강백호가 골밑을 맡고 송태섭이 포인트가드로 볼을 운반하고, 서태웅은 돌파하면서 득점을 올리니까요. 슈터가 비어 있는 상황이었습니다. 다행스럽게도 점프슛에는 자신이 있었어요.
만약 다른 포지션이 비어 있었다면 전혀 다른 정대만을 만날 수 있었을 것 같다. 다른 포지션을 맡아 보고 싶다는 생각은 없는가?
J: 그랬을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 슈터인 게 만족스럽습니다. 가장 멀리서 가장 높은 호를 그리는 슛을 던지는 게 즐겁기도 하고, 유독 공이 망을 통과하는 소리가 잘 들리는 것 같아서요. 음, 그래도 맡아 보고 싶은 다른 포지션은… 키가 컸다면 센터를 해 보고 싶었을 것 같습니다.
그럼 이제 북산 농구부에 합류하기 전의 이야기는 충분히 들은 것 같으니 합류 후의 이야기를 들어 보고 싶다. 곧장 전국 대회를 위한 지역 예선전에 참가했는데, 주전을 차지하는 데 어려움은 없었나?
J: 있어야 할 것 같은데 아쉽게도 없습니다. (웃음) 같은 학년이었던 준호라는 친구는 제가 적응하는 데 어려움이 있을 거라고, 2년의 공백을 메우기 힘들 거라고 생각했던 것 같은데 어렵지 않게 주전을 따냈습니다. 생각보다 몸이 농구하는 감각을 잊지 않고 있었던 것도 있지만, 그만큼 북산 농구부의 선수층이 얇은 편이어서 가능했던 일인 듯합니다. 하지만 늦게 합류한 만큼 3학년인데도 불구하고 등번호는 14번이었어요.
맞다. 그래서 다들 처음엔 1학년으로 오해했던 사람도 분명 있었을 것 같다. 농구부 내에서 재량껏 번호를 바꾸어 줄 수 있었을 텐데 14번이었던 이유가 있는가?
J: 저로서는 14번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었습니다. 처음 유니폼을 받아서 입는데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기분이 들었어요. 다시 입는 일은 없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막상 입으니까 뭔가 벅차오르는 것 같았고요. 사실 이전까지 저에게 익숙한 번호는 4번이었습니다. 중학교 때도 자연스럽게 그 번호를 받았고, 고등학교 때도 그 번호를 받게 될 거라 당연하게 여겼던 적도 있거든요. 하지만 지금은 14번이라는 번호가 마음에 듭니다. 가능하면 쭉 이 번호를 가슴과 등에 짊어진 채 뛰고 싶어요.
사실 북산이 지역 내의 이목을 모으기 시작한 것은 상양고등학교(이하 상양)와의 맞대결이 기다리고 있는 B시드 예선전의 모든 경기에서 100 득점 이상을 기록하면서부터다. 팀 분위기가 굉장히 상승세였을 것 같다.
J: 그 경기들이 우리에게 자신감을 불어넣었던 것 같습니다. 우리 팀의 진정한 상대는 ‘전국구’부터다라고 생각하게 된 계기가 된 것 같습니다.
그렇다면 상양전이 실질적인 라이벌과의 첫 매치였던 셈이었을 텐데 어떤 분위기였나?
J: 앞선 경기들과는 다르게 다들 시합 전부터 긴장을 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저도 앞에서는 센 척을 했지만 예외는 아니었고요. 다른 경기는 괜찮았는데 오랜만의 큰 경기라 그런가 중학교 때와는 다르게 긴장됐습니다. 그러다 화장실에 갔는데, 제 이야기가 나왔습니다. 중학교 시절이 전성기였다, 이젠 전보다 못하다는 소리를 들었죠. 제 득점을 5점으로 막겠다고 장담하는데, 솔직히 화도 나고 자존심도 상했습니다. 딱 정곡을 찔린 느낌이라서, 그 말이 시합 내내 계속 머릿속을 맴돌더라고요.
시합 기록으로는 그 장담을 지키지 못한 것 같다. 실제로는 어땠는가?
J: 사실 전반과 후반 10분까지는 ‘5점으로 막는다’는 말이 지켜졌습니다. 전반과 후반 내내 성실하게 저를 쫓아다니며 마크하더라고요. 절 마크했던 선수의 이름은 장권혁인데, 시합 중에 ‘고교 농구를 무시하지 마라’는 말도 했죠. 아마 저와는 다르게 3년간 성실하게 농구를 해 온 사람으로서 농구를 내팽개쳤다가 돌아온 제가 좀 얄미웠던 거 아닐까요?(웃음) 실제로 그 경기에서 처음으로 2년 동안 농구를 쉬고 왔다는 공백기를 실감했습니다. 후반으로 갈수록 체력이 부치더라고요. 고등학교 리그에서 40분 동안 뛰는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점점 점수 차는 벌어지는데, 땀은 비오듯 쏟아지고, 숨이 가빠서 아무 말도 할 수 없더라고요. 벤치에 앉아 있는 1학년들까지 그러다 제가 쓰러지는 게 아닐까 걱정할 정도였죠. 하지만 안 감독님께서는 상양전에서 득점을 위해서는 제가 필요하다 판단하시고 끝까지 빼지 않으셨어요. 그런데 점점 그렇게 궁지에 몰리니까 오히려 오기가 생겨났습니다. 중학교 때도 딱 그랬거든요.
‘단념하면 바로 그때 시합은 끝난다’는 안 감독님 말씀이라도 떠올린 건가?
J: 그 말도 떠올리긴 했지만 그보다는 중학교 시절의 진짜 제 모습을 떠올렸던 것 같습니다. 저 자신도 잊고 있었던 모습이에요. 사람들은 저를 고교 리그에서는 사라졌던 중학교 MVP로만 기억하겠지만, 저는 사실 제가 힘든 상황에서야말로 더욱 불타오르는 사람이거든요. 저도 중학교 시절의 영광만 생각하고, 그 영광을 얻을 수 있게 한 진정한 제 모습을 잠시 잊고 있었던 거죠. 그러면서 파울로 얻어낸 자유투 세 개를 모두 성공시키고, 더 공격에 박차를 가하려 했습니다.
그 자유투 세 개가 12점 차였던 점수를 추격해 북산의 대역전극으로 이어지는 단초가 된 셈이다. 그러면서 멈춰 있던 3점 슛의 포문도 열렸다. 세 개를 연속으로 성공했고 그중 하나는 3점 라인 안에 있다가 바깥으로 나온 뒤에 던진 슛이다. 쫓아가고 있는 상황에서 공격 한 번이 중요한데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는지 궁금하다.
J: 슈터로서 어느 흐름에 올라타면 무조건 이 슛은 들어간다는 확신이 들 때가 있습니다. 상양과의 후반전에서 그런 흐름을 느꼈죠. 그 경기에서 지면 정말 저의 고등학교 농구는 끝나는 거였으니까요. 절대로 물러설 수 없었고 그 자리에서 뭔가 해내지 못하면 그 길고 긴 우회로를 돌아온 의미가 없었습니다.
그 후 서태웅 선수의 패스를 상양의 김수겸 선수가 커트하고 공이 바깥으로 튀어 나가는 것을 잡으려 몸을 날렸다가 크게 넘어졌다. 무릎 부상이 있었던 만큼 걱정스럽지는 않았는가?
J: 그땐 몸이 먼저 반응했습니다. 부상이고 뭐고 잴 틈도 없이 어떻게 해서든 공격을 이어 가야 한다는 생각뿐이었어요. 다행히 중심을 잃기 전 서태웅이 달려와 주어서 무사히 공을 넘겼고 득점으로 이어졌죠. 어디 부상을 입은 건 아니었지만 일단 후반 2분여에서 더 이상 무리하지 않고 교체되어 나왔습니다.
그때 다치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결국 그때 패스한 공이 서태웅 선수의 덩크로 이어져 동점을 만들고 그 후 60:62로 극적인 역전에 성공하지 않았는가.
J: 벤치에서 지켜보는 데 마지막까지 조마조마한 마음이었습니다. 심지어 백호가 넣은 덩크는 점수로 인정되지 않은 채 파울로 퇴장까지 당해 버려서 더 불안했죠. (웃음) 그래서 다들 시합이 끝난 후 로커룸에서 그대로 지쳐 곯아떨어져 버렸습니다. (크게 웃음)
4년 연속으로 인터 하이에 진출했던 상양을 꺾은 일로 지역 신문에도 실린 것을 확인했다. 하지만 결승 리그의 다음 상대가 전국에서도 강호로 유명한 해남대부속고등학교(이하 해남)였는데, 이 역시 쉽지 않은 경기였을 것 같다.
J: 정말 쉽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우리는 강한 팀을 만날수록 투지에 불타오르는 체질인 것 같습니다. 다들 진심으로 인터 하이에 나가는 걸 목표로 했기 때문에 해남은 통과점이라고, 통과점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해남과의 시합은 전반부터 주장인 채치수 선수가 부상으로 빠지며 우여곡절이 많았다. 특히 해남의 포인트가드, 도내 넘버 원 가드인 이정환을 상대하는 데 고전을 많이 한 듯하다.
J: 사실입니다. 실제로 치수가 다쳤을 때는 다들 많이 흔들렸죠. 명실상부한 북산의 주장이니까요. 여러모로 상상하지 못한 작전이나 플레이에 고전했던 경기입니다. 선수 한 명 한 명을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왕자(王者)였죠. 그럼에도 전반전에는 각성이라도 한 것 같은 서태웅의 플레이 덕에 동점으로 마무리지을 수 있었습니다. 후반에는 치수가 돌아왔지만, 이정환의 존재감은 정말 압도적이었어요. 결국 안 선생님께서 극단적인 작전들을 고안해 주셨죠. 더블팁으로 막아 보고, 후반 10분에는 백호를 제외한 넷이서 오직 이정환을 막기 위해 달려들기도 했죠. 백호는 외곽의 슛을 막기 위해 해남의 신준섭을 전담 마크하고요.
먼저 이름을 언급해 준 김에 묻고 싶다. 이정환 선수만으로도 힘겨운 게임이었을 텐데, 해남의 슈터 신준섭 선수도 굉장히 깨끗한 슛을 쏘기로 유명하고, 실제로 여러 개의 연속해서 3점 슛을 성공시키기도 했다. 실제로 시합에서 만났을 땐 같은 슈터로서 어떤 느낌이었는가?
J: 같은 슈터로서 자극받았습니다. 특히 저에게는 부족한 절대적인 연습량이 느껴지는 슛 폼이었어요. 의식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 되겠죠. 실제로 그날 저의 개인적인 성적은 그리 좋은 편은 아니니까, 제 슛 감이 조금만 더 좋았다면 어땠을까 싶은 생각도 한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결국 저의 연습량이 부족했기에 나온 결과라고 생각하고, 두 번 다시 같은 후회를 하고 싶지 않아 꾸준히 슛 연습에 힘쓰는 중입니다.
그럼에도 6점 차의 상황에서 마침내 3점 슛을 넣는 데 성공했다. 그러고 보면 위기와 맞닥뜨릴수록 불타오른다는 게 결국 클러치에 강한 타입으로 배짱이 좋은 건가?
J: 말씀을 듣고 보니 어려운 상황에서 제가 공격해야 할 때, 그 압박감으로부터 도망친 적은 없습니다. 이건 어릴 때부터 쭉 그랬던 것 같아요. 배짱이 좋은 걸까요? 아마 농구부 녀석들이 들으면 단순히 뻔뻔한 거라고, 포장하지 말라고 구박할 것 같습니다. (웃음)
다시 시합 이야기로 돌아가면, 엎치락뒤치락을 반복하며 명승부를 펼쳤다. 하지만 결국 서태웅 선수는 후반 1분여를 남기고 부상 우려와 체력적 한계에 벤치로 돌아갔고, 정대만 선수도 한계였던 것 같다.
J: 아무리 정신력으로 버텨 보려 했지만, 그땐 정말 한계에 달한 건지 치수가 던지는 패스를 눈치채지 못하고 있다가 서태웅과 교체로 들어온 동급생이었던 준호의 기지로 도움을 받았습니다. 스스로가 한심해지는 순간이었는데, 준호는 오히려 힘내자고 저를 도닥이더라고요. 그리고 백호가, 그 녀석도 참 건방진 후배인데, 갑자기 제 뒤통수를 손날로 치면서 ‘투지를 보여 줘, 대만 군!’이라 말했습니다. 아마 기자님께서도 산왕과의 인터 하이 경기를 보셔서 아시겠지만 좀 많이 엉뚱하거든요. 느닷없이 관계자석에 올라가질 않나, 치수의 엉덩이를 찌르질 않나. (웃음) ‘대만 군’은 백호가 저를 부르는 호칭인데, 그 녀석 기본적으로 선배를 대하는 태도가 좀 그렇습니다. 주장인 치수도 ‘고릴라’라고 부르니까요.
하지만 아직까지 분명하게 기억하는 것을 보면 그 말에 자극을 받긴 한 것 같다.
J: 아무래도 정신이 번쩍 들긴 했습니다. 아직 시합이 끝나지 않았는데, 농구를 시작한 지 반년도 되지 않은 녀석한테 이런 말을 들을 정도라니 하는 생각도 한 것 같아요. 그리고 실제로 백호는 그 뒤의 플레이에서 정말 ‘투지’를 보여 줬고요.
강백호 선수의 덩크가 남은 시간 후반 20초에 성공하고 디펜스 파울로 자유투까지 얻어 낸 후의 흐름은 정말 놀랍다. 자유투는 실패했고, 리바운드에는 성공하면서 채치수 선수가 정대만 선수에게 패스를 했는데 그때 시도한 3점 슛은 결국 들어가지 않았다. 많이 분했을 것 같은데….
J: 해남전은 복기할수록 정말 안 풀리는 날이었던 것만큼은 확실한 듯하네요. (웃음) 절호의 찬스였고, 완전히 오픈된 상태인 데다가 공이 제 손을 떠나는 순간의 그 느낌이 너무 완벽했습니다. 무조건 들어갔다고, 우리가 이길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안 닿았다고 생각했던 공이 해남 1학년 전호장의 손톱 끝을 살짝 스쳤더라고요. 저도 백호의 말마따나 투지를 보인 셈인데, 그 투지가 너무 지나친 나머지 눈치를 챘던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강백호 선수가 리바운드에 성공했다. 하지만 뒤에 이어진 패스 미스로 인해 북산으로서는 어쩌면 버저 비터의 찬스를 놓치게 되었는데, 아깝진 않았나?
J: 사실 저는 백호의 실수보다는 제 회심의 마지막 3점 슛이 실패한 것이 더 문제였다고 생각합니다. 그 슛만 들어갔다면 그런 식의 패배를 겪지는 않았을 테니까요. 비슷한 순간이 오면, 마지막으로 슛을 던져야 할 순간이 오면, 그땐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노라 다짐했어요.
‘절대로 실패하지 않겠다’라는 비장한 다짐을 할 만큼이면 역시 뼈아픈 패배였던 것 같다. 그 후 북산의 분위기는 어땠는가.
J: 다들 첫 패배라 얼마간 분위기는 어두웠는데, 그럼에도 인터 하이에 진출하는 것을 포기하진 않았습니다. 각자 각오를 새롭게 다졌죠. 아, 맞아. 백호가 빨간 까까머리가 된 게 이 시합에서 한 실수를 반성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남은 두 경기를 모두 이겨야 하는 상황에서 북산만의 특별한 연습이 있었는지가 궁금하다.
J: 일단 시합 전까지 감을 잃지 않으면서 체력적으로 무리하지 않는 연습 매뉴얼로 진행했습니다. 그러다 안 선생님께서 1학년 대 2, 3학년 연합팀으로 연습 게임을 제안하셨죠. 저는 처음엔 심판이었는데 안 선생님께서 특별 지시로 치수 대신 2, 3학년 팀의 센터로 들어가 백호에게 센터로서의 수비를 알려 주게 되었습니다.
아까 하고 싶은 포지션으로 센터를 말하더니, ‘아무거나 다 합니다’라는 말이 중학생의 허풍으로는 들리지 않는다.
J: 중학교 리그 수준이니 당연히 고등학교나 성인 리그와 비교하는 것은 무리겠지만, 그럼에도 얼추 정말 할 줄은 압니다. 특히 수비는 자신이 있는 편이고요. 연습 시합은 한 번이었지만 나름 즐거운 기억으로 남아 있습니다.
그러고 보니 대학에서 현재 전공이 체육교육과다. 가르치는 것에도 흥미를 갖고 있는지 궁금하다.
J: 아직 전공 수업도 몇 번 들은 지 얼마 안 돼서, 사실 ‘선생님’이 될 수 있다는 게 좀 믿기지 않습니다. 하지만 가능성을 품고 있는 누군가에게 제가 알고 있는 것들을 알려 줌으로써 한 층 더 성장한 모습을 볼 수 있다면 그건 또 충분히 보람찬 일인 것 같아요. 물론 지금은 농구에 더 집중하고 싶고, 무언가를 가르치는 제 모습은 잘 상상이 가지 않지만요.
북산이 무림고등학교와의 경기는 쉽사리 승리하면서, 능남과 북산은 인터 하이 진출권을 놓고 피 튀기는 승부를 펼쳤다. 이때 감독석이 공석이었는데 어떤 사정이 있었던 것인가?
J: 시합 전날 안 선생님께서 갑자기 쓰러지셨습니다. 연세 탓도 있겠지만, 아마 결승 리그에 진출하게 되면서 안 선생님께서도 여러모로 과로를 하신 것 같았어요. 그 소식을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온 백호가 전달해 주었죠.
안한수 감독님께서는 정대만 선수의 정신적 지주이신 것 같은데 만큼 걱정이 컸을 것 같다.
J: 불안하고 걱정스러웠죠. 당장 병문안을 갈까도 생각했는데, 그보다는 꼭 다음 날의 시합에서 이겨서 인터 하이에 나간다는 소식을 안겨 드리고 싶었습니다. 아, 그리고 그날 감독석은 공석이었지만, 대신 안 선생님의 사진을 가져다 놓았어요. 그 사진 앞에서 농구부에 돌아오기까지 여러모로 폐를 끼친 제가 그 녀석들에게 해 줄 수 있는 최대한의 보상은 인터 하이에 데리고 가는 거라고 생각했던 게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경기 초반에 수비적으로 인상적인 모습을 보였다. 맨투맨 수비를 하고 있던 상황에서 능남은 황태산 선수의 아이솔레이션으로 공격해 왔다. 그때 수비를 담당하던 강백호 선수가 뚫리자 오펜스 파울을 유도했다.
J: 룰이 있는 스포츠에서 파울을 어떻게 유도하는가도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황태산 선수는 뛰어난 운동 능력을 갖고 있는 선수였고 맨투맨으로 방어하고 있던 상황이라 다른 팀원들이 백업으로 직접 막기란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의 판단이었다고 생각합니다. 백호 녀석은 ‘일부러 비켜주고 뒤에서 내려 치려는 천재의 작전’이다를 운운했는데, 그냥 창피해서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죠. (웃음)
능남과의 경기 초반에서 팀의 기둥인 채치수 선수가 다소 주춤하는 모습을 보였고, 강백호 선수는 부상으로 인해 잠시 경기에서 교체되었다. 이때 황태산 선수를 마크하는 것으로 바뀌었는데 안 선생님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누가 지시한 상황인지 궁금하다.
J: 그때 능남의 주된 공격 패턴은 폭발적인 공격력을 가진 황태산 선수를 주력으로 하고 있었습니다. 계속 리드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었죠. 어떻게 해서든 전반에 점수차를 한 자리로 줄여야 할 필요성을 팀원 모두가 느끼고 있었습니다. 이에 치수가 백호와 교체되어 나온 준호가 기존에 제가 맡았던 능남 안영수 선수를 마크하고, 제가 황태산 선수를 마크하라고 지시했고요. 더불어 1점이라도 점수를 줄이기 위해서는 3점 슛이 필요한 상황이라 송태섭이 패스를 돌리겠다고 했죠. 저는 모두 저에게 돌리라고 했습니다. 이대로 계속 끌려다니기만 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요.
황태산 선수를 실제로 상대해 보니 어땠는가?
J: 마음만 먹으면 문제없다고, 맡겨만 놓으라고 호언장담을 했지만 실제로 상대해 보니 여간내기가 아니라는 게 느껴졌습니다. 처음 상대했을 때는 파울로 공격을 끊어야 했죠. 하지만 그래도 빈틈을 어떻게든 찾아내 볼을 뺏고 공격을 이어 갔습니다. 송태섭에게서 서태웅으로 간 공이 다시 저에게 왔을 때는 때마침 오픈된 상황이었기에 망설임 없이 슛을 쐈고요. 그리고 전반 종료 직전에 다시 한번 3점 슛을 성공시켜서 32대 26, 6점 차이로 점수를 좁히면서 끝마쳤습니다.
전반에 목표했던 바를 이루긴 했지만 계속 리드를 빼앗기고 있는 상황이었다. 안 감독님도 부재한 상황에서 중간 휴식 시간에 로커룸의 분위기는 어떤 편이었나?
J: 다들 투지에 차 있었어요. 저는 6점 차라면 쉽게 뒤집을 수 있다고, 할 수 있다고, 반드시 승리한다고 계속 외쳤는데 안 선생님이 부재 중인 상황에서 후배들에게 더더욱 강한 모습을 보여 주고 싶었던 것 같습니다. 파울 개수를 조심해야 한다는 이야기도 하고, 다시 한번 마음을 다잡았죠.
후반에는 정대만 선수에게는 능남 허태환 선수가 마크로 붙었다. 허태환 선수의 플레이는 어떻게 느꼈는가?
J: 확실히 허태환 선수의 수비는 끈질기고 따돌리기 어려웠죠. 하지만 전반 동안 힘을 아껴 두었던 서태웅이 활약해 주었습니다. 후반 시작부터 골을 넣어서 이제 시작이라는 걸 보여주는 듯이 굴었죠. 그래서 허태환 선수의 수비가 끈질겼을 때도 적절한 타이밍에 달려오기에 스크린을 걸어 주고, 득점으로 이어질 수 있도록 도왔습니다. 득점에다 자유투까지 추가로 받아서 후반 초반부터 1점으로 점수 차를 좁힐 수 있었어요.
후반에서 양팀 모두 점수를 내주지 않기 위해 필사적으로 수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무려 3분간 36대 35인 상황을 유지한 게 대단히 인상적이었다.
J: 저는 계속 황태산 선수의 파울을 유지하는 수비를 했고, 변덕규 선수는 치수가, 윤대협 선수는 서태웅이 악착같이 틀어막는 식으로 버텼습니다. 그리고 반대로 능남에서는 허태환 선수가 저를 막고 변덕규 선수가 치수를, 윤대협 선수가 서태웅을 막았죠. 서로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시합이라서 그런 진풍경이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실제로 정대만 선수가 황태산 선수를 마크한 뒤로, 경기 기록표를 보면 황태산 선수의 득점이 멈춰 있다. 다만 능남과의 시합에서 정대만 선수의 파울이 다소 많은 편이다. 이는 역시 황태산 선수의 공격을 막기 위한 작전이었나?
J: 사실 파울을 하지 않고 막을 수 있었다면 가장 좋았겠지만, 그때는 1점이라도 잃을 수 없었기에 파울을 범해서라도 공격을 끊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습니다. 그만큼 저도 허태환 선수에게 마크당한 뒤로는 점수를 내기 어려웠고요.
그 뒤로 능남에게도 북산에게도 파울이 복병으로 작용했다. 능남 변덕규 선수의 파울이 4개가 되면서 팽팽했던 상황이 조금 북산에게 유리하도록 기울어졌다.
J: 네, 백호가 변덕규 선수로부터 파울을 받아 내고, 자유투는 실패했지만 리바운드 후에 저에게 패스하면서 처음으로 점수가 역전되었습니다. 그렇게 골 밑이 혼전일 때 바지런히 발을 놀려 비어 있는 곳으로 가 슛을 넣는 게 슈터의 역할이니까요.
그 후의 북산은 파죽지세로 공격을 이어 나가 59:46, 13점 차까지 점수를 벌렸다. 그 상황에서 능남은 다시 변덕규를 내보내면서 다시 분위기 전환을 시도했는데, 송태섭 선수가 패스 커트 이후 직접 골까지 넣으며 15점 차로 앞서 나갔다.
J: 사실 우리의 자랑인 공격력은 포인트가드 송태섭의 빠른 스피드에서 나온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윤대협의 블로킹을 뚫고 골을 넣은 것은 확실한 기선 제압이 되었죠. 아마 능남에게는 그 공격이 꽤 뼈아프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저희로서는 인터 하이에 나가는 데 한 걸음 더 나아갔다는 희망에 차올랐고요.
하지만 그 후로 능남의 추격이 매서웠다. 특히 변덕규 선수를 잠시 벤치로 내보냈던 파울이 북산에게도 똑같은 부담으로 적용되었다.
J: 윤대협 선수의 파울 유도로 송태섭의 파울이 4개째가 되었을 땐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우리가 승리하는 데 송태섭은 절대 빠질 수 없는 선수였고, 저와 백호 그리고 치수 모두 파울이 3개씩이니까 아슬아슬했죠. 벤치가 약하다는 것을 실감하는 순간이기도 했고요.
윤대협 선수도 마치 각성한 것처럼 추격해 오기 시작한 상황이 북산으로서는 매우 부담스러웠을 듯하다. 타임을 불러 벤치에 모든 선수들이 모였을 때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가?
J: 안 선생님께서 안 계시니, 작전 타임을 위해 벤치로 모여도 마땅한 묘책이 없었죠. 그냥, 잠시 흐름을 끊고 절대 질 수 없다는 의지만 재확인하고 나오는 시간이긴 했습니다.
조심스럽지만 정대만 선수는 그 뒤 탈진으로 교체되었다. 상양에서도 느꼈던 체력적 한계가 문제가 된 것인가?
J: 부끄럽지만 사실입니다. 탈수증이 왔거든요. 휴식과 수분 보충으로 해결될 문제긴 했지만 이미 경기 시간은 얼마 남아 있지 않았고 더 이상 시합에 나갈 수는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코트 바깥 복도의 계단에서 줄창 이온 음료만 들이켰어요. 그때만큼 스스로가 한심했던 적이 없었습니다. 수통에 담겨 있던 이온 음료가 다 떨어져서 후배한테 부탁했더니 캔을 잔뜩 뽑아 왔는데, 그 캔을 따지도 못할 만큼 손에 힘이 들어가지 않았거든요. 그 이후로 탈수가 오지 않도록 수분 보충을 더욱 신경 쓰게 되었습니다.
그사이 경기 시간은 2분 여가 남아 있었고, 능남은 북산을 턱밑까지 쫓아와 65:64라는 상황을 만들었다.
J: 남은 시합은 벤치에서 응원하는 수밖에 없었죠. 사실 코트 위에 있던 녀석들에게는 잔소리로밖에 들리지 않았을 것 같지만요. 다들 멋진 플레이를 보여 주었고,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그렇기에 계속 안 선생님이라면 이 상황에서 어떻게 하셨을지를 고민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제가 거기서 뭔가를 더 할 수는 없었고, 결국 코트 위에서 뛰던 친구들이 마지막까지 멋진 플레이를 보여 주었죠. 백호의 신체 능력은 같은 선수로서도 경이로울 정도지만, 저는 준호가 3점 슛을 성공시킨 게 무척 기뻤고 자랑스러웠습니다. 그 녀석은 저와 함께 농구부에 들어와서 제가 농구를 외면하고 있는 동안에도 꾸준히 노력해 온 성실한 친구거든요. 그 노력이 절대 헛된 게 아니었음을 자기 스스로 증명한 거죠. 그런 모습을 보고 앞으로 절대 연습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지, 단 한순간도 코트를 떠나지 말아야지 다짐한 것 같습니다.
답변으로 말해준 대로 결국 북산은 초보자 강백호 선수와 식스맨이었던 권준호 선수의 활약으로 70 대 66의 승리를 거두며 인터 하이에 진출했다. 그때의 소감이 궁금하다.
J: 그 기쁨은 정말 말로 표현하기가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치수와 준호는 눈물까지 보이더라고요. 아마 그동안의 감회가 밀려온 게 아닐까 싶어요. 그 길로 곧장 안 선생님께서 입원해 계시는 병원으로 달려가 인터 하이 진출 소식을 알려 드렸습니다.
북산으로선 첫 인터 하이였을 테니 부담이 컸을 것 같다. 남은 기간 동안에는 안 감독님의 지도하에 특별 훈련을 받았는가?
J: 연습에서는 시간이 절대적인 것 같습니다. 단기간에 실력이 확 늘 수는 없는 법이고, 경험은 오직 시간으로만 쌓을 수 있는 것이니까요. 다들 연습 시간에 흐트러짐 없이 무서운 집중력을 보였고요. 음, 하지만 특별 합숙을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치수의 집에서요.
경기 영상들을 보고 분석한 것인가?
J: 아뇨, 시험 공부를 했습니다. 낙제 점수를 4개 이상 받으면 인터 하이에 나갈 수 없는 게 교칙이었거든요.
그 말인즉슨…?
J: 치수를 제외한 농구부 주전 모두 낙제가 4개 이상으로 위험했죠. (웃음) 낙제 군단이라는 별명이 생기기도 했어요. 치수의 집에서 공부를 한다고 어머니께 전화를 드리니까 처음에는 전혀 믿어 주질 않으시더라고요. 다들 간신히 재시험에서 낙제를 면했습니다. 아, 그 이후로 여름 방학에 평범한 농구 연습 합숙을 하기도 했어요.
<월간 농구>의 인터 하이 분석 기사에서 북산의 평가가 C였다는 것에 다들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고 들었다. 이 자리를 빌어 심심한 사과의 말을 전한다.
J: 아직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습니다. 산왕이 AA, 풍전고등학교(이하 풍전)는 A, 해남도 A, 북산은 C였죠. 어릴 때부터 <월간 농구>을 정기 구독하고 있었는데, 그때는 구독을 끊을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습니다. (웃음)
정말로 구독을 끊은 건 아닌지….
J: 아뇨. 아직도 잘 보고 있습니다. 객관적으로 보면 북산은 처음으로 인터 하이에 출전하는 거니 그런 평가를 받는 건 어쩔 수 없는 일이었겠죠. 안 선생님께도 보여 드렸었는데, 선생님께서는 오히려 부담 없으니 좋다고, 시합이 끝났을 땐 이 책이 틀렸다는 걸 알려 주자고 말씀하셔서 괜찮아졌거든요.
빨리 이야기를 다른 곳으로 돌려야 할 것 같다. 인터 하이 진출을 앞두고 긴장하지는 않았나?
J: 저는 시합 당일이 아니고서야 따로 긴장하는 일은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치수가 저한테 묻더라고요. 중학교 때 전국 대회에 나갈 때 긴장한 적이 없냐면서. 딱히 모르겠다고 하니까 자기는 이런 기분이 처음이라면서 한밤중에 조깅을 하러 나갔어요. 하지만 막상 당일이 되니까 다들 괜찮아 보였어요.
실제로 풍전과 치른 인터 하이 첫 대회는 여러모로 사고가 많았던 것 같다. 초반에 팀의 에이스였던 서태웅 선수가 뇌진탕으로 빠졌고, 그 외의 자잘한 트러블이 많았던 듯한데…
J: 실제로 전반이 끝난 후 로커룸에서 분위기가 험악했습니다. 몸싸움이 거칠었거든요. 송태섭은 주먹까지 휘두를 뻔했는데, 때리기 직전에 간신히 멈춰 서서 다행이었죠. 그 녀석 주먹 진짜 아프거든요.
맞아 본 것처럼 들린다.
J: 노코멘트하겠습니다. (웃음)
그렇다면 다들 어떻게 마인드컨트롤을 하고 후반에 임했는지는 물어도 되는가?
J: 서태웅이 돌아왔습니다. 한쪽 눈을 심하게 다치긴 했지만 뛸 수 있다고 하더라고요. 안 선생님께서도 전반의 잘못과 실수들을 따끔하게 지적해 주시면서 다들 눈을 뜨고 흥분을 가라앉혔죠. 그리고 ‘우리들은 강하다!’라고 구호를 외쳤습니다.
전반에는 풍전의 페이스에 말리지 않기 위해 일부러 천천히 완급 조절을 하며 하프 코트 농구를 했다면 후반에는 기존 북산의 빠른 스피드를 활용했다. 그리고 잠잠했던 3점 슛도 터지기 시작했는데, 이유가 있는가?
J: 아무래도 여름을 보내는 사이 속공과 빠른 공격력이 특기인 북산의 스타일이 완전히 몸에 익었던 것 같습니다. 슛은 템포가 굉장히 중요한데, 늘 빠르게 날아오는 패스를 받자마자 쏘는 것에 익숙해져서 그런 듯해요. 앞서 제가 득점을 못 하는 사이 백호는 처음으로 점프 슛을 성공시키고, 서태웅은 한 쪽 눈이 안 보이는 상황에서도 놀라운 집중력으로 계속 득점을 넣어 주어서 다행이었습니다. 사실 풍전과의 경기에서는 저보다 다른 팀원들이 워낙 인상적인 모습을 보여 주었죠.
그렇다면 이제 산왕과의 시합으로 넘어가겠다. 사실 지금은 북산이 강팀이라는 것을 알지만 당시로선 북산이 풍전을 이긴 것도 꽤 이변이었다. 거기에 2차전은 지금도 고교 농구 최강이라고 하면 떠올릴 수밖에 없는 산왕이었는데, 어떤 대책을 세웠는가?
J: 안 선생님께서 산왕의 지난 플레이들을 비디오로 보여 주셨습니다. 과연 무시무시하다고 느꼈어요. 안 선생님께서는 산왕의 실력만이 아닌 다른 것도 언급하셨죠. 관중석에서 모두 산왕을 응원할 거고, 무슨 일이 벌어지더라도 동요하지 않는 결의가 필요하다고 하셨습니다.
분위기가 굉장히 무거웠을 것 같은데….
J: 아마 저마다 긴장을 하지 않았을까요. 저와 다른 3학년들은 숙소 앞에서 잠깐 이야기를 나눴는데…. 모두 ‘산왕’이라는 이름에 압박을 느끼고 있긴 했습니다. 그럼에도 저희는 처음부터 전국 제패를 목표로 했거든요. 준호가 그러더라고요. ‘지금까지 남아 있는 건 그때 진정으로 전국 제패를 믿었던 녀석들뿐’이라고요. 저는 잠깐 자리를 비운 시기도 있었지만, 사실 제 꿈 속에서도 산왕은 언젠가 반드시 싸워야만 했던 상대였죠. 오히려 긴장되던 마음이 차분해졌습니다.
대망의 산왕전에서 정대만 선수는 초반부터 3점 슛으로 기선을 제압했고 그 뒤에도 3연속 3점 슛을 성공시켜 강렬한 인상을 남겼다. 보통 후반에서 터지는 일이 많았는데 예외적으로 전반전부터 정대만 선수에게 가는 패스가 많았던 것은 북산의 전략이었나?
J: 그날은 최고의 컨디션이었어요. 처음 던진 슛이 들어갔을 때부터 몸의 균형이나 손끝에 공이 걸리는 상태, 손목 모두 좋았거든요. 안 선생님께서 초반에는 저를 위주로 공격한다는 지시를 내려 주셨습니다. 감독님께 기대를 받으면 뭔가를 보여 주고 싶은 게 선수의 마음이잖아요. 주저하는 마음이 없었던 것 같아요. 더 잘하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 산왕 김낙수 선수의 디펜스가 철저하게 따라붙었다. 여태까지 정대만 선수를 마크했던 여러 선수들이 있는데 김낙수 선수 디펜스는 어땠는지?
J: 전국 톱클래스의 수비 전문 선수인 만큼 압박감을 느꼈습니다. 키는 저보다 작았지만 절대 밀리는 느낌이 들지 않더군요. 그럴 때는 직접 슛을 던지기보다 돌파하면서 다른 팀원이 공격할 수 있도록 기회를 만들었습니다. 슛이 들어가지 않는다고 해서, 슛을 쏠 수 없는 상황에 처했다고 해서 주저앉을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요. 그리고 그 시합을 통해 안 선생님께서 저를 믿어 주고 계시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낄 수 있었어요. 마침내 선생님께 무언가를 증명해 보인 것만 같았습니다.
전반은 36:34로 북산이 리드를 가져가면서 좋은 모습을 펼쳤다. 하지만 후반에서는 더더욱 시합이 힘들어졌는데, 후반 개시 3분 만에 존프레스와 함께 산왕의 맹공격이 펼쳐졌다.
J: 저도 가드로서 송태섭이 받는 압박을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보았습니다. 제가 송태섭에게 공을 주는 것부터가 어려웠고, 태섭이가 공을 받고 나서는 바로 달라 붙으니 더욱 패스할 수가 없었죠. 처음에는 산왕 쪽의 코트를 밟을 수도 없었으니까요.
후반에는 산왕 최동오 선수와 매치업이 되었다. 원래의 주전 멤버인 만큼 어려움이 있었을 듯하다.
J: 처음 코트에서 맞붙은 순간부터 상당한 실력자라고 느꼈습니다. 특히 처음 돌파를 뚫렸을 때는 허를 찔린 듯했죠. 저희의 득점은 완전히 가로막혀 있는데 산왕은 16점을 쉽게 넣어 버렸으니까요. 다들 코트 위에서 무력감을 느꼈을 거예요. 안 선생님께서 작전 타임을 사용해 벤치로 불러 주셨을 때, 다들 얼굴이 참담하더라고요.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백호만 패스를 받지 못했다고 날뛰었죠. (웃음)
그 작전 타임 이후 처음으로 북산이 산왕의 코트로 넘어올 수 있었다.
J: 안 선생님께서 북산의 돌격대장에게 직접 지시하신 일이니까요. 자신의 힘으로 해결해 보이라고요.
선수를 믿기에 내릴 수 있는 대담한 결단 같다. 그런데 돌격대장? 송태섭 선수의 별명인가?
J: 맞습니다. 송태섭은 돌격대장이고, 치수는 고릴라 주장…. 서태웅은 이걸 별명이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지만 에이스이고, 백호는 여우라고 부르고 있죠. 백호 별명이 가장 많은데 빨간 원숭이가 대표적이지만, 본인은 스스로를 리바운드왕이나 천재라고 부르고요.
지금 본인의 별명은 이야기하지 않았다. 이미 조사해서 알고 있긴 하지만 직접 말해주면 좋을 듯핟다.
J: …제 입으로 말하기는 조금 쑥쓰럽지만, 불꽃남자입니다. 왜인지는 모르겠는데 늘 응원을 와 주는 친구가 그렇게 적힌 깃발까지 만들어 흔들어 주고 있더라고요.
다시 시합 이야기로 돌아가자면, 결국 20점 차가 나는 것은 피하고 싶었지만 20점까지 점수 차가 벌어졌다. 아무도 북산이 승리할 거라고 기대하지 않았을 점수차이고, 설령 미리 미래를 알고 있는 사람이 북산이 이긴다고 말하러 와도 아무도 믿지 않았을 텐데 코트 위에서 뛴 선수로서 어떤 심정이었는가?
J: 솔직히 무언가를 생각하고 고민할 겨를이 없었습니다. 일단 전반에 김낙수 선수의 디펜스로 인해 체력이 많이 떨어진 상태였거든요. 숨을 쉬는 것도 벅찰 만큼 힘들었죠. 점점 벌어지는 점수 차를 신경도 쓸 수 없을 만큼 무력했던 것 같아요. 안 선생님께서 마지막 작전 타임까지 써서 벤치로 불러들인 후 생각이 너무 많다고, 발을 움직이자고 말씀하셨지만 솔직히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습니다. 생각이 많다기보다는 오직 하나만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지나?’라고. 근데 그걸 받아들이고 인정하고 싶지 않으니까 더 몸이 둔해지는 거였죠. 차라리 그런 걱정을 하기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나았을 테지만, 그땐 그런 데까지 생각이 미치지 않았어요.
그 작전 타임에서 강백호 선수가 교체되었다가 잠시 뒤에 다시 나온다. 그리고 고교 농구 역사상 두 번 다시 없었을 장면이 연출되었다. 같은 팀원으로서 어떻게 받아들였나?
J: 당연히 제정신인가 싶었죠. (웃음) 심지어 팀 이름도 ‘산양’이라고 말하다니 사람을 열받게 하는 방법을 알고 있구나 싶었고요. 그렇게 사고를 쳐 놓고서는 내려와서 의기양양한 얼굴로 이제 이길 수밖에 없게 되었으니 알아서 해라 하는 태도를 보이니까 다들 기가 찼죠. 이미 점수는 24점이나 차이가 났고요. 쉽게 따라잡을 수 없는 점수 차라고 했는데, 내 알 바냐 하는 태도로 자기는 풋내기니까 그런 거 모른다잖아요. 어이가 없는 말이긴 한데, 동시에 다들 깨달았던 것 같아요. 이긴다고, 이길 수 있다고 말하긴 했지만 실제로 승리를 믿고 있진 않았구나 하고요.
그때 다시 각성한 것인가?
J: 그러고 싶었는데, 그 뒤로도 실수가 있었어요. 최동오 선수의 움직임에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죠. 치수도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그때 송태섭이 좋은 타이밍으로 인터셉트해 주지 않았다면 다시 한 골을 먹혔을 거예요. 그 건방진 2학년 포인트 가드가 3학년 선배 둘을 한 번에 혼냈죠. 혼나도 싸는 상황이긴 했지만요. 체력이 조금만 있었어도 뭐라 대꾸를 했을 텐데 그런 말도 나오지 않았습니다.
사실 북산에 선수층이 튼튼했다면 그런 상황까진 오지 않았을 것 같다.
J: 한 사람도 빠질 수 없는 배수의 진 상황이었으니까요. 인터하이에 오는 내내 그 얇은 선수층이 북산의 약점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패배하고 싶지는 않았어요. 빠지고 싶지도 않았고요. 그때 절 마크했던 최동오 선수는 제가 왜 벤치로 들어가지 않는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얼굴로 쳐다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아마 선수가 있다고 해도 저는 안 들어가겠다고 고집을 피웠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백호처럼 날뛰진 않았지만 저도 제정신이 아니었거든요. 내 이름이 뭐냐, 나는 누구냐 하고 혼잣말을 하고 있으니 놀라는 최동오 선수의 얼굴이 정말 볼만했습니다.
솔직히 후반에 다시 정대만 선수가 3점 슛을 넣었을 때 놀랍기만 했다. 서 있는 게 고작인 것 같았던 선수가 다시 빈틈을 찾아 뛰면서 슛을 던지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J: 치수의 스크린이 절묘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달렸어요. 그리고 그 타이밍에 절묘하게 패스가 날아왔고, 망설이지 않고 슛을 쐈습니다.
보통 그 정도 체력이면 몸의 중심이 흔들리거나 자세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슛을 쏘진 않을 것 같은데 망설임은 없었나?
J: 오히려 슛만 쏠 수 있는 상태였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송태섭에게 가 날 활용하라고 말했죠. 치수가 스크린을 걸어 줄 테니 내가 오픈이 되는 순간을 놓치지 말라고…. 달리는 것도 돌파도 디펜스도 제대로 할 수 없는 제가 할 수 있는 건 오직 3점 슛뿐이었으니까요. 오직 제가 슛을 넣어야만 하는 림만 보였죠.
툭 치면 쓰러질 것 같은 상태였기에 좀비처럼 보이기도 했다. 그런 상태에서 3점 슛을 쏘는 게 믿기지 않았다.
J: 그 경기를 본 사람은 다들 그렇게 말씀하시더라고요. (웃음) 그때 백호가 저를 ‘파김치 대만’이라고 불렀습니다. 음, 아까 별명 이야기할 때 일부러 말하지 않았는데 여기서 밝히네요.
적절한 별명인 듯하다. 하지만 정말 본인을 믿지 않고서는 쏘기 힘든 슛이었던 것 같다.
J: 저 자신을 믿기보단 팀원을 믿었습니다. 치수가 걸어준 스크린과 송태섭이 던져준 패스 그리고 설령 골이 들어가지 않더라도 백호가 리바운드를 잡아 줄 거라는 생각에 던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하지만 실제로 리바운드가 필요 없을 만큼 경이로운 성공률을 보였다. 9개의 시도 중 8골이 성공했다. 89%라는 기록이 대단하다.
J: 사실 그랬다는 건 나중에 알게 되었어요. 몇 개의 3점 슛을 던졌고 성공시켰는지를 시합 중에 신경 쓸 여유가 하나도 없었는데 나중에 기록을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매니저인 한나에게 시합 기록지를 복사해 달라고도 했어요. 기념으로 챙겨 두었죠. 제 자랑입니다.
돌이켜보면 산왕과 북산의 대결은 정말 치열한 공방전이었다. 북산이 간신히 점수 차를 줄이며 따라잡았을 때 산왕은 정우성 선수의 뛰어난 플레이로 도망갔다. 그렇게 끝나는 줄 알았던 경기는 다시 서태웅 선수의 활약으로 새롭게 흐름을 탄다. 서태웅 선수가 적극적으로 패스에 가담하면서 북산의 공격 루트가 더욱 새로워졌고, 정대만 선수도 그 패스를 받은 선수 중 한 명이다.
J: 서태웅에게는 두 차례 패스를 받았는데요, 한 번은 최동오 선수가 헐레벌떡 뛰어오길래 그대로 치수에게 넘겼습니다. 놀라서 막으러 오는 걸 보니 좀 기분이 좋더라고요. 위협이 되는 선수라는 뜻이니까요. 그 모습이 좀 웃겨서 더 이상 팔도 올라가지 않는다고 했어요. 거짓말이었지만요. (웃음) 서태웅이 볼을 스틸한 후 속공으로 달려갔는데, 덩크가 가로 막히니까 다시 저에게 패스하더라고요. 그때 귀에 언뜻 ‘쏘지 못해!’라고 소리치는 목소리가 들리긴 했는데, 웃기지 말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 슛이 들어간 순간의 전율은 평생 잊지 못할 것 같아요.
점점 산왕을 압박한 끝에 관중석에서도 북산을 응원하는 소리가 하나둘 새어나왔다. ‘악당’이었다가 ‘영웅’이 된 셈인데 기분이 어땠는가?
J: 다들 어리둥절했지만 기분은 좋았습니다. 그리고 그 응원에 뭔가 느끼는 게 있었던 것인지 작전 타임으로 벤치에 돌아갔을 때 치수가 눈물을 다 보이더라고요. 덩치만 컸지 은근 눈물이 많아요. 그래서 기회다 싶어 아낌없이 놀려 주었죠.
보통 팀 동료라면 위로를 해 줄 것 같은데….
J: 북산은 그렇지 않으니까요. 작전 타임 후 나가기 전, 치수가 ‘고맙다’라고 폼을 잡으며 말하는데 다들 뭐가 고맙냐며 왜 고맙다고 하는 거냐며 나는 나를 위해서 뛰는 거라고 한 녀석도 빠짐없이 구박했죠. 물론 저도 포함해서요. 저희 사이는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동료애와는 거리가 멀거든요. 널 믿는 게 아니라 너의 농구를 믿는 거다 하고 말해도 좋을 정도죠.
그래도 팀원의 실력은 믿는 것 같다.
J: 그건 믿을 수밖에 없습니다. 북산은 강하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기세를 탔던 북산에 강백호 선수가 부상으로 교체되는 일이 벌어졌다. 루스볼을 잡다가 크게 넘어지면서 생긴 부상이 맞나?
J: 맞습니다. 백호 녀석 등에서 아픔이 느껴지는데도 계속 괜찮은 척을 했다가 결국 고통을 참지 못하고 벤치로 나가게 되었죠. 그 이후에 치료와 재활을 잘 받아서 윈터컵에서는 함께 뛰었지만 당시로서는 큰일이었어요. 다들 더 이상의 시합은 무리라고 말했는데 백호 본인이 계속 뛰겠다고 고집을 부렸죠. 안 선생님께서도 만류하셨는데, 무슨 말로 설득했는지 저는 코트 위에 있어 듣지 못했지만 결국 다시 돌아왔습니다.
그럼에도 백호 선수가 빠지지 않았기 때문에 신현필 선수의 슛을 블로킹하고 그 공이 속공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그 속공에서 산왕전의 명장면이라고 손꼽는 ‘4점 플레이’가 나왔다. 파울을 의도한 것인가?
J: 1분도 채 남지 않은 시간에서 어떻게든 1점이라도 더 따라가야 했습니다. 송태섭의 노룩 패스를 받았을 때 최동오 선수가 달려오고 있음을 느꼈어요. 원래 슛을 쏘던 타이밍보다 살짝 기다렸습니다. 최동오 선수의 실력이 우수한 만큼 확실히 막으러 올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의도했던 대로 타이밍 좋게 달려와 주어 다행이었죠.
푸싱 파울로 넘어지고 일어나면서 무릎에 키스를 한 사진이 남아 있다.
J: 사실 그게 사진으로 찍혔을 줄은 전혀 예상하지 못했습니다. (웃음) 나중에 보니까 조금 창피하더라고요. 하지만 완치되었다고, 아무 문제도 없다고 이야기를 들어도 저로서는 왼쪽 무릎을 의식하지 않을 수가 없었습니다. 보호대를 차고 있는 것도 예방의 차원이기도 하지만 심리적인 요인이 좀 큰 것 같아요. 없으면 괜히 불안하거든요. 무릎에다 그렇게 한 것도, 그런 이유가 없지 않아 있었죠. 잘 버텨 주었다, 아프지 않아서 고맙다, 뭐 그런 마음이었던 거 같아요.
그 뒤의 40여 초는 매우 숨가빴다. 당초 산왕이 승리할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시합이 그 누가 이겨도 이상하지 않은, 아무도 승리를 예측할 수 없는 시합이 되었다. 그리고 끝내 마지막 서태웅 선수와 강백호 선수의 콤비 플레이로 버저 비터를 성공해 냈는데, 어떤 기분이었는지 궁금하다.
J: 자랑스러웠습니다. 저 자신도, 같이 뛴 팀원들도. 아마 이 팀이 아니었으면 해내지 못했을 일이라 생각해요. 농구부에 돌아와 뛴 모든 시합에서 그때의 저와 중학교 시절의 제 모습을 비교했지만, 산왕전에서 처음으로 고등학생 정대만을 긍정할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여태까지의 이야기만으로 꿈만 같은 여름이었다. 지역 예선에서도 무명이었던 팀이 인터 하이로 고교 농구 최강의 팀에게서 승리한 것인데, 그 다음 경기에서 허망하게 지고 말았다.
J: 지학고등학교는 전력으로 상대해야만 이길 수 있는 팀이었기에, 산왕과의 사투로 모든 힘을 써 버린 게 패배의 요인이었습니다. 분하고 아쉬운 마음이 없었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 안에서 다들 좀 개운한 표정을 하고 있었던 게 떠오르네요. 모두의 꿈이었던 전국 재패는 이루지 못했지만, 산왕이라는 팀의 상징성이 그것을 대신 해 준 것 같습니다. 전국을 몇 번이고 제패한 최강의 강호를 꺾었기 때문에 아쉬운 마음만 안고 돌아오진 않았어요.
인터 하이가 끝난 후의 북산 농구부에 대해 조금 더 자세하게 듣고 싶다.
J: 우선 치수와 준호는 은퇴하고 2학년 송태섭이 주장이 되었습니다. 곧장 겨울 대회를 향한 준비를 시작했죠. 서태웅은 주니어 국가대표 선수로 선발되어 잠시 자리를 비웠고요. 그리고 백호는 잠시 학교도 쉬면서 치료를 받고 재활에 들어갔습니다. 여름은 그저 훈련만 하느라 바쁘게 지나갔어요. 살짝 어수선했죠. 아무래도 시끄럽게 난리를 치던 녀석이 빠져 버리고, 원래 믿고 따르던 주장도 세대 교체가 되었으니까요.
3학년으로서 유일하게 은퇴를 하지 않은 이유는?
J: 준호와 치수는 3년 동안 후회 없이 농구를 했지만, 저는 사실 고교 농구에서 뛴 건 초짜인 백호랑 똑같은 수준이었으니까요. 그대로 고등학교에서의 농구를 그만두고 싶지 않았습니다. 무엇보다 계속 농구를 하기로 마음먹은 이상, 대학에 가고 싶어졌어요. 대학에 가서 농구를 하고 싶었죠. 그 전까지만 해도 대학이나 미래 같은 것도 별로 생각하지 않고 살았는데, 욕심이 나더라고요. 윈터컵까지 나가서 어떻게든 대학 추천을 따고 싶었습니다.
그렇다면 2학년인데 주장이 된 송태섭과 많이 부딪쳤는지?
J: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라는 말을 엄청 실감했습니다. 산왕전에서 소리칠 때부터 알아봤지만, 치수보다 더 엄한 주장이 되어 버렸거든요. 보고 배운 게 치수의 모습일 테니 엄한 건 그렇다 치는데, 원래부터 선배 대접을 안 해 주긴 했지만 아예 ‘이젠 내 시대야’라는 말을 하는 건 좀 황당했습니다. 하지만 싸운 건 아니고요, 싸우지는 않았습니다.
훈련은 더 엄해졌는가?
J: 원래 치수의 동생이라서 자주 농구부에 찾아오고 응원해 주었던 소연이가 매니저로 들어왔는데요, 그 친구도 자기 오빠만큼 농구를 좋아하는 애라 훈련 매뉴얼이 더 촘촘해지고 전문적으로 변했습니다.
그럼 정대만 선수는 주로 어떤 훈련을 했는지 궁금하다.
J: 슛 성공률을 높이려고 애썼습니다. 기적처럼 어떤 흐름을 탔을 때만 넣는 게 아니라, 평균치를 올리고 싶었죠. 치수가 은퇴하고 백호도 재활을 받는 중이니 리바운드와 골밑 장악력이 약해졌다는 게 북산의 약점이 되었으니까요. 슛 성공률을 늘리는 데는 정확한 자세로 많이 쏘는 수밖에 없으니까, 오전 5시부터 체육관에 나가 슛 연습을 했습니다. 그리고 체력을 늘리는 데도 신경을 썼고요. 앞으로 대학 리그에서 뛴다면 더더욱 보강해야 하는 점이라고 생각해서 인터벌과 러닝에 집중했습니다. 바다가 가까운 곳이라 해변을 자주 뛰었던 것 같아요. 그러다 송태섭에게 들켰더니, 따라하지 말라는 소리만 들었습니다. 뭘 따라하지 말라는 건지…. 그러다 한나도 소연이도 알게 되어서 아예 정기적인 연습 메뉴로 자리잡았어요.
아까부터 질문하고 싶었던 게 있는데, 결국 채치수 선수는 윈터컵을 함께 뛰었다.
J: 사실 저는 예상하고 있었습니다. 그 성격에 절대로 은퇴할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입시 공부를 해야 한다고 빠져 놓고 오히려 성적이 더 떨어졌다는 말을 들었을 땐 그럼 그렇지 싶었어요. 집중하지 못하고 계속 이도 저도 아닐 바에야 그냥 농구를 하라면서 선생님과 부모님까지 권할 정도였다고 하니 말 다했죠. 아마 든든하게 골밑을 물려줄 후배가 있었다면 조금 더 안심했을지도 모르지만, 책임감이 큰 녀석이니 그럴 순 없었던 듯합니다. 결국 윈터컵도 나가기로 결정했을 땐 다들 반겼어요. 든든하니까요. 하지만 주장 자리인 4번은 송태섭에게 그대로 물려주고, 15번 유니폼을 받았습니다. 북산은 3학년이 나란히 14번과 15번을 달고 뛰는 이상한 팀이 되었어요.
그럼 윈터컵 이야기로 넘어가 보겠다. 예선은 무사히 통과하고 지역 결선 시드에서부터 앞서 맞붙었던 팀들과 다시 싸우게 되었는데 어떤 느낌이었는지 궁금하다.
J: 다들 아주 칼을 갈고 나왔더라고요. 특히 상양과 능남은 모두 북산 때문에 인터 하이에 나가지 못한 탓인지 아주 철저해졌습니다. 상양의 경우엔 3학년들이 모두 은퇴하지 않고 남아 있었기 때문에 더 단단했고, 능남은 주장이 된 윤대협과 무시할 수 없는 스코어러인 황태산의 합이 매우 좋았어요. 해남이야 늘 강했고요. 특히 그해 전국 성적 2위라는 쾌거를 올려서인지 더 기세가 오른 상태였습니다.
하지만 북산은 지역 예선 1위로 윈터컵 출전에 성공했다.
J: 능남의 경우 역시 주장 변덕규의 공백을 무시할 수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저희는 치수가 돌아왔으니까요. 유명 체대에서 스카웃해 올 만큼 이미 실력은 전국급인 데다가, 농구를 마음껏 못 한 만큼 굶주린 고릴라 그 자체여서 지역 결선 시드에서 골 밑 승부는 졌던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송태섭은 산왕전에서 점프 슛 성공률이 낮은 탓에 당한 도발이 제대로 먹혔는지, 슛 연습을 엄청 했거든요. 이미 볼 핸들링, 드리블은 전국 최고 수준이니까 호랑이에 날개를 단 거죠. 실제로 호랑이 주장이기도 했고요. 그리고 주니어 국가대표에 선발된 서태웅은 개인 기량이 더 늘었을 뿐만 아니라 팀 플레이어로서도 활약하기 시작했죠. 게다가 백호도 무사히 재활을 마친 후에 복귀했고요. 빠르게 실력이 늘었던 만큼 재활하는 동안 운동을 쉬었던 터라 다들 걱정했는데 진짜 운동 신경과 신체 능력만큼은 발군이라 예상보다 빠르게 적응했어요.
거기에 정대만 선수 본인에 대한 이야기는 쏙 빠졌다.
J: 아무래도 제 입으로 이야기하면 자기 자랑이 되는 셈이라….(웃음)
그렇다면 자기 자랑을 말할 수밖에 없게끔 질문을 던져야겠다. 일단 윈터컵 본선 모든 경기의 첫 득점이 정대만 선수의 3점 슛인 점이 인상적이다.
J: 일종의 작전이었습니다. 처음부터 제 슛감이 매우 좋으니까 조심하라고 일부러 보여 주는 식이었어요. 그래야 상대팀이 좀 더 저를 확실하게 경계하고 제가 슛을 쏘지 못하도록 무조건 한 사람은 저에게 오니까요. 그러니까 무조건 성공해야 하는 슛이었던 건데, 다행히 모두 성공했죠.
그 작전이 잘 통한 것 같은지?
J: 다행스럽게도 잘 먹혔습니다. 일단 제가 외곽에서 왔다 갔다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다들 상당히 신경을 썼으니까요. 그리고 그만큼 허점이 생겼을 때 다양한 공격 패턴을 시도해 볼 수 있었습니다.
여름 인터 하이는 이미 시간이 꽤 지난 탓에 한 경기씩 복기했지만, 윈터컵은 바로 지지난 호인 1월호 특집으로 다루었기 때문에 매 경기마다 세세하게 묻지는 않겠다. 그렇지만 자기 자랑에 서툰 정대만 선수를 대신해 윈터컵 본선 경기의 3점 슛 평균 성공률이 42%를 달성한 기분은 어떤지 묻고 싶다.
J: 당연히 짜릿하죠. 늘 새롭고요. 최고예요. (웃음)
윈터컵 결승전에 대해서도 다양한 기사가 나온 만큼 이번 인터뷰에서는 정대만 선수에 대해서만 질문을 하도록 하겠다. 우선 후반 12초에서 마크를 당했을 때 패스를 돌리지 않고 본인이 직접 골을 넣었다. 오랫동안 공을 갖고 있지 않는 정대만 선수로서는 드문 일이었다.
J: 체력 훈련의 효과를 본 탓인지 여름의 산왕전과는 다르게 윈터컵 결승 후반전의 기억이 또렷하고 선명하게 남아 있습니다. 송태섭이 강백호에게, 강백호가 다시 저에게 패스를 해 주었고, 치수가 스크린까지 걸어 주었지만 또 다시 수비가 따라붙었죠. 아마 평소의 저였다면 패스를 한 뒤 다시 한번 슛을 쏠 자리를 노렸을 겁니다. 아무래도 아이솔레이션으로 돌파는 부담스러웠으니까요.
하지만 우리 모두가 알다시피 그러지 않았다. 그 이유가 있는가?
J: 시합 중에 내리는 판단 대부분은 굉장히 직관적이고 순간적이라서 뭔가 뚜렷한 이유를 생각하는 일은 드뭅니다. 하지만 그때는 이유가 있었어요. 제가 쏘고 싶었습니다. 이기적인 플레이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이 골을 마지막으로 이기고 싶었어요. 2점 차였기 때문에 2점을 성공시켜도 동점이고 연장전으로 가야 했죠. 훈련을 통해 체력을 늘리고, 다른 후배들도 열심히 연습해 경기 중간중간 교체하면서 뛸 수 있었다고 해도 북산은 여전히 벤치가 약했고, 경기 시간이 길어지면 그만큼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3점 슛이 필요한 상황이었어요. 그렇기 때문에 저에게 공이 왔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팀원들도 저를 믿고 있는 것 같았어요. 제 착각일 수도 있겠지만, 저의 3점 슛으로 경기를 끝내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듯했거든요.
수비수와의 일대일 대치 3점 슛 라인에서 꽤 뒤로 빠져 슛을 날렸다. 당연히 마지막 슛인 만큼 성공률을 높이기 위해 가장 자신 있는 자리로 가야 하는 게 일반적인 듯하다.
J: 수비가 철저했기 때문에, 블로킹에 가로 막히지 않기 위해서는 틈이 필요했습니다. 드리블을 하면서 상황을 살폈어요. 저도 누구처럼은 아니지만 볼 핸들링에는 자신이 없진 않았거든요. 그러다 3점 라인에서 조금 멀어지니 수비하는 선수는 오히려 제가 다른 곳으로 달려갈 거라 생각하고 움직이는 듯했습니다. 그래서 그 점을 이용하기로 했어요. 제가 슛을 쏘고 성공시킬 수 있는 가장 먼 곳으로 나가자고요.
아무리 그래도 과감한 결정이었다. 산왕전의 4점 플레이에서도 그렇지만 답변해 준 대로 클러치에서 겁을 먹지 않는 성격이 빛을 발한 듯하다. 정말로 불안하진 않았나?
J: 음, 안 선생님의 말씀을 흉내 내 보자면… 슈터는 ‘스스로를 의심하는 순간 그 슛은 실패합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무조건 넣는다, 들어간다 하고 던져야지, 슛을 쏘는 순간 실패할지도 몰라 하는 생각을 하면 절대로 들어가지 않아요. 모두가 저 슛은 들어가지 않는다고 생각할 때도 슛을 던진 본인은 무슨 소리야, 들어가거든 하고 비웃을 줄 알아야 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불안하지 않았어요. 저는 넣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실제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곳에서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타이밍에 슛을 시도했다. 그리고 솔직히 나 역시 그 슛이 들어갈 거라고 생각하지 못했던 만큼 그 버저 비터는 충격적이었다.
J: 여름의 해남전에서 던진 마지막 슛은 분명 들어갈 수 있었던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전호장 선수의 손톱에 스쳐 결국 들어가지 못했죠. 그때를 기점으로 슛 타이밍에 대해 더 신경쓰게 되었던 것 같아요. 산왕전에서는 최동오 선수의 파울을 유도하기 위해 살짝 늦췄다면, 윈터컵의 버저 비터는 우선 최대한 시간을 끌다가 상대가 반응하지 못할 만큼 빠르게 자세를 잡고 쐈습니다.
그 슛이 던져지는 순간 경기장은 마치 마법에 걸린 것처럼 조용했던 것을 알고 있는가?
J: 그랬나요? 전 제 착각이라 생각했습니다. 어떤 슛을 던지고 나면 실제로 공이 호를 그리며 날아가 림을 통과해 떨어지기까지 아주 짧은 순간일 텐데 마치 시간이 매우 느리게 흐르거나 혹은 멈춘 것 같다는 착각이 들기도 하거든요. 그래서 전 그때도 그런 순간이라고 생각했어요. 실제로 조용한 줄은 몰랐습니다.
그리고 그 슛이 북산의 위닝샷이자 버저 비터가 되어 윈터컵 우승을 결정했다. 고교 농구 선수로서 뛸 수 있는 마지막 공식 경기에 마지막 골을 넣은 셈인데 무척 감격스러웠을 것 같다.
J: 솔직히 슛이 들어가자마자 팀원들이 우르르 달려드는 바람에 이리저리 치여서 그런 의미까지 생각할 여유가 없었어요. 하지만 진짜로 기뻤습니다. 전국 제패를 해낸 거니까요. 치수는 이미 울면서 포효하고 있었고, 백호도 송태섭도 얼굴이 엉망이더라고요. 심지어 그 무표정한 서태웅마저 웃고 있었는데, 정작 제 표정은 어땠는지 잘 모르겠어요. 눈이 막 시큰시큰했던 것 같은데 아마 저도 울지 않았을까요. 음, 그리고 정말로, 농구를 하길 잘했다고 생각했습니다. 진심으로요. 농구를 계속 하고 싶다고, 생각했어요. 그리고 그 슛은 농구의 신이 있다면, 제가 그 자리에 있어도 된다고 말해 주는 것 같은 일종의 허락 같았습니다. 감격스러웠고, 아마 지금까지 살아온 20년이라는 시간 중에서 가장 기뻤던 순간이었던 것 같습니다.
버저 비터로 인해 중학교 3학년 때 MVP로 뽑혔고, 고등학교 3학년 때도 MVP가 되었다. 이제는 중학 MVP가 아니라 고등 MVP 정대만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대부분일 듯하다. 그 소감은 어땠는가?
J: 중학 MVP는 계속 저의 뒤를 따라다니던 타이틀이었습니다. 고등학교에 막 입학했을 때는 그 타이틀이 좀 거추장스러웠어요. 저를 ‘정대만’이라는 선수가 아닌 중학 MVP라고만 부르는 것이 싫었거든요. 네, 준호 말마따나 진짜 철이 없었습니다. 그러다 방황을 끝내고 다시 농구 코트로 돌아왔을 때 그 타이틀은 제가 뛰어넘어야 하는 벽이자 과제였고, 중학 MVP 정대만이야말로 저의 라이벌이었어요. 계속 중학교 시절의 제 모습과 스스로를 비교했고, 채찍질했어요. 예전에는 더 잘했는데, 예전에는 더 할 수 있었는데 하면서요. 하지만 동료들과 함께 뛰는 경기가 늘어나면서 더 이상 그런 생각은 하지 않게 되더라고요. 그리고 새로운 저 자신을 만들었던 것 같습니다. 중학교 MVP가 아니라 지금의 정대만은 누구이고 뭘 할 수 있는지요. 윈터컵 MVP는 저에게 정말 과분한 훈장이긴 해요. 오랫동안 농구를 쉬고 농구를 미워했던 주제에 감히 받아가는 영광이죠. 하지만 누구에게 양보하고 싶지는 않더라고요. 분에 넘치는 상이라 한다면, 앞으로 더 좋은 선수가 되어 MVP라는 이름값을 갚아 나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 이름값을 갚는 데 적절한 대학에 온 것 같다. Z대학은 농구 명문학교로 유명하지 않은가? 대학에 가서 농구를 하고 싶어 윈터컵까지 나간 만큼 소식을 들었을 땐 무척 기뻐했을 것 같다.
J: 처음에는 후배들의 장난 전화인 줄 알았습니다. 제가 너무 간절해했던 터라 가을에 그런 식으로 장난을 쳤던 적이 있거든요. 물론 말투부터 얼토당토 없어서 바로 걸리긴 했지만, 이번에는 좀 장난에 공을 들였나 하고 3초 정도 의심했던 것 같아요. 전화로 약속을 잡은 후 바로 학교로 오셨고, 안 선생님과도 함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때 무슨 이야기가 오갔는지 궁금하다.
J: 일단 대학 스카우터 선생님들께서는 제가 윈터컵에서 보인 실적이 괜찮았고, 3점 슈터는 일단 그 실력을 인정받으면 설 자리가 있는 편이긴 하지만, 아무래도 고등학교 2년 동안의 출전 기록이 없는 것을 궁금해하셨어요. 저로서는 입이 백 개가 되어도 할 말이 없는 터라 뭐라 대답해야 할지 망설이고 있는데 안 선생님께서 먼저 감싸 주셨습니다. 신입생 때 연습 중 부상을 입었고 몸은 완치됐지만, 그때 마음에 상처를 좀 입어 농구부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고요. 선생님께서 신경을 쓰지 못했다면서 당신의 잘못이라고 하셨어요. 면목이 없어 그저 숨고 싶은 마음뿐이었습니다. 제 잘못이라고, 제가 혼자 방황했다고, 얼른 정정해서 말씀드렸는데 안 선생님께서 제 어깨를 두드려 주시더라고요. 그리고 선생님 당신의 지도자 경력을 걸고, 무릎 부상도 문제가 없고, 3점 슈터로서의 능력도 훌륭하다고 추천해 주셨어요. 필요하다면 추천서도 써 주실 수 있다고 하셨고요.
안 감독님은 정대만 선수의 인생에 빠질 수 없는 은사님이신 건 분명히 알겠다.
J: 선생님께서 북산에 오시기 전 Z대학의 감독님이셨던 것도 대학 진학에 도움이 되었던 것 같고요. 마음 같아서는 선생님께 저와 같이 대학으로 돌아가 주시면 안 될까요 하고 빌고 싶었습니다.
지금 감독님이 들으면 섭섭해하실 것 같은데….
J: 아, 저, 아니, 그런 의도로 한 말은 아닙니다. 지금 감독님도 너무 좋은 분이시고, 음… 죄송합니다. 제가 안 선생님과 관련되면 다소 과해지는 편이라….
너무 침울해하는 것 같으니 그만 놀리도록 하겠다. 윈터컵에서 우승도 하고, 바라던 대학 진학까지 얻어 낸 만큼 졸업식 분위기가 아주 화기애애했을 것 같다. 실제로는 어땠는가?
J: 이런 생각을 하게 될 줄은 정말 몰랐는데, 학교를 떠나고 싶지 않더라고요. 졸업식이 거행된 곳은 농구부가 늘 연습하던 체육관이었는데, 졸업식을 위해 한쪽으로 치워진 농구 골대를 보니 식이 시작되기 전부터 괜히 코가 시큰거렸습니다. 한 명씩 올라가서 졸업증서를 받는데, 어머니와 아버지께서 와 주셨거든요. 제 이름이 불리니까 엄청 크게 박수를 쳐 주셨어요. 아, 그리고 농구부 후배들도 요란스러웠고요. 다들 어찌나 시끄럽던지. (웃음) 선생님들께서도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해 주셨습니다. 저 때문에 많이 고생하셨던 분들이거든요. 그렇게 다들 떠나는 걸 축하해 주고 새로운 시작을 응원해 주는데, 진짜 너무, 정말, 가고 싶지 않았습니다. 아 이런 말 하면 또 대학 팀 감독님과 선배님들께 실례일까요. 가기 싫어서가 아니라, 쭉 제 이야기를 들으셨으니 아시겠지만 저의 고교 농구는 너무 짧았으니까요. 조금만 더 일찍 마음을 고쳐 먹었다면 어땠을까, 조금만 더 길게 저 녀석들과 농구를 했다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근데 후회와는 조금 달랐던 것 같아요.
후회하고 있다 생각했는데 후회가 아니라고 하니 조금 의아하다. 조금만 더 정확하게 설명해 준다면.
J: 음… 막상 들으시면 그게 후회랑 뭐가 다른가 싶으실 수 있는데, 조금 더 오래 하고 싶었고 그걸 못 해 아쉽지만, 동시에 과거로 돌아가 그 상황을 고치고 싶다고까지는 바라지 않았기 때문에 후회라고 생각하진 않았습니다. 만약 그랬다면 인터 하이에서도 윈터컵에서도 아낌 없이 응원해 주었던 영걸이라는 친구와 이렇게 친해질 수 없었을 테고, 무언가를 새로 얻은 만큼 잃는 것도 있을 거니까요. 그 방황의 시간은 분명 제 인생에서 가장 헛되게 보낸 거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런 시간이 있었기에 지금 이렇게 농구를 할 수 있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지를 더 뼈저리게 느끼니까요. 그냥 헛된 시간도 소중한 시간도 다 쌓여서 지금의 제가 된 거라 생각하고, 전 현재 제 자신이 자랑스럽습니다.
무슨 말인지 잘 이해했다. 그럼 이제 슬슬 인터뷰를 마쳐야 할 때가 온 것 같다. 긴 인터뷰에 성심성의껏 답해 주어서 무척 감사하다. 마지막으로 대학 리그에 데뷔하는 신인 정대만으로서의 포부가 궁금하다.
J: 제가 뛰는 모습을 본 모두가 제 이름을 기억하는 선수가 되고 싶습니다. 아,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포기하지 않는 선수가 되겠습니다.
이 인터뷰를 읽은 분들은 정대만 선수의 이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J: 그래 주시면 정말 감사하죠. 인터뷰 고생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